주 5일 근무제와 일당 5달러, 자본가들의 공공의 적이 된 사나이

헨리 포드와 1일 5달러의 파격

1914년 1월 5일, 포드 모터 컴퍼니의 창업자 헨리 포드와 부사장 제임스 카젠스는 하루 8시간 노동에 최소 5달러의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디트로이트 하이랜드 파크 공장 노동자 1만 4천여 명의 평균 일급은 9시간 노동에 2달러 30센트 수준이었다. 하루아침에 임금을 두 배 이상 올리겠다는 선언은 즉각 전 세계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 파격적인 조치를 두고 해석은 엇갈렸다. 컨베이어 벨트의 가혹한 노동 강도를 정당화하려는 수수께끼 같은 셈법이라는 비판부터, 극심한 이직률을 잡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혹은 순수한 자선 사업이나 치밀한 언론 플레이라는 주장이 교차했다.

93분마다 차 한 대가 만들어지던 공장

1913년부터 1914년 사이에 도입된 이동식 조립 라인은 모델 T의 생산 시간을 12시간 30분에서 93분으로 단축시켰다. 생산 효율이 뛰면서 제조 원가가 떨어졌고, 차 값이 내려가자 폭발적인 주문이 밀려들었다.

문제는 현장의 노동자들이었다. 기존의 숙련 기술은 단순 반복 작업으로 분해되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작업자들은 금세 지루함을 느꼈고 무단결근과 지각이 잇따랐다. 1913년 포드 모터 컴퍼니가 유지한 평균 근로자 수는 1만 3,623명이었으나, 한 해 동안 채용한 인원은 5만 4,488명에 달했다. 이직률은 370퍼센트에 이르렀다.

공장이 멈추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람을 채워 넣어야 했지만, 신규 인력을 교육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포드와 경영진은 높은 임금이 공장의 지루함을 견디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당대 디트로이트를 흔들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등 노동조합의 파업 움직임과 공장 점거에 대한 공포도 작용했다. 당시 생산 책임자였던 찰스 소렌센은 훗날 인터뷰에서 노조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5달러 임금을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물대포를 맞으며 문 앞을 지킨 사람들

발표 직후 중서부 전역에서 수천 명의 구직자가 디트로이트 하이랜드 파크 공장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날씨는 영하였고, 인파가 밀려들자 공장 주변은 마비되었다. 포드사의 보안 책임자 해리 베넷은 집당한 구직자들을 향해 소방 호스로 물을 분사했다. 사람들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돌아와 줄을 섰다. 포드 측은 디트로이트에 최소 6개월 이상 거주한 주민만 채용하겠다고 발표한 뒤에야 사태를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월급봉투에 달린 조건들

5달러 일급은 조건 없는 인상이 아니었다. 기본급은 기존과 동일한 2달러 30센트였고, 나머지 2달러 70센트는 회사가 제시한 요건을 충족해야 받는 일종의 이익 공유형 보너스였다.

포드는 가정에 경제적 문제가 있는 근로자가 공장에서 집중력을 잃는다고 보았다. 회사는 사교부(Sociological Department)를 설립하고 성공회 목사인 새뮤얼 마키스 신부를 부서장으로 앉혔다. 감독관들은 노동자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생활 실태를 조사했다.

보너스를 받으려면 술을 끊어야 했고,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었으며, 집에 하숙인을 들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저축을 해야 했다. 신원 조사를 담당한 직원들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질문을 던졌다. 조건을 위반한 사실이 적발되면 지적이 개선될 때까지 보너스 지급이 유예되었다.

1921년 사교부가 사실상 해체될 때까지, 신청자의 90퍼센트가량이 요구 조건을 맞춰 보너스를 받았다.

중산층이 된 공장 노동자들

5달러 선언 이후 포드의 이직률은 급격히 떨어졌고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노동자들은 잘릴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공정 개선 아이디어를 냈다. 인근 자동차 제조사와 부품 납품업체들도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임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돈이 다시 자사의 제품 수요로 돌아오는 구조를 확인했다. 임금이 오르면서 공장 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드는 모델 T를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로 전환된 것이다. 1914년 1월 5일의 결정은 미국 산업 현장의 임금 구조와 노동자의 삶을 바꾼 사건으로 기록되었다.